『실패한 이미지―사진과 그 대항적 실천들』은 전형적인 사진 실천의 지도 바깥을 모험하는 사진 비평서다. 네덜란드의 문학‧시각예술 연구자인 저자 에른스트 판알펀은 사진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투명한 매체라는 기존의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이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을 어떻게 변형하는지 고찰하고자, 저자는 우선 사진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살핀다. 그런 다음 ‘사진다운 사진’에 부합하지 않는 네 가지 유형의 비주류 사진 실천들을 비평한다. 바로 연출된 사진, 흐릿한 이미지, 과소/과다 노출 이미지, 아카이브 이미지다. 이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거나, 선명함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빛이 피사체를 밝히지 않거나, 그 속에서 지시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다. 실격 판정을 받은 이 이미지들이 사진 역사의 구석으로 밀려났음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듯, 여러 시대와 장르의 도판 200여 점은 독특하게도 본문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여백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사진 내부의 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사진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방식 중 극히 일부만을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실패한 이미지: 사진과 그 대항적 실천들
Failed Images: Photography and Its Counter-Practices
편집자의 글
사진은 정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가?
매체의 투명성을 향한 굳은 믿음에 균열을 내다
이미지를 형성하는 카메라의 기술적 원리에 의해, 사진은 예술가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회화와 달리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재현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피사체에서 반사된 빛이 렌즈를 통해 들어온다. 셔터를 누르면 그 빛이 맺은 상이 필름에 기록된다. 그렇게 우연한 순간을 낚아챈 듯, 시공간의 일부를 도려낸 듯,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 새겨진다. 이 과정에서는 어떤 변형도 일어날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 『실패한 이미지―사진과 그 대항적 실천들』의 저자인 네덜란드의 문학‧시각예술 연구자 에른스트 판알펀은 사진이 현실을 충실히 복사한다는 통념에 도전해 그 반례를 찾아 나선다.
일찍이 독일의 문화 이론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지적했듯, 매체 특정성은 기술적이고 형식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지배적으로 이루어진 실천들에 의해서도 정의되기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예술의 주된 패러다임이던 시기에 형성된, 투명한 매체로서의 사진 개념은 여전히 공고히 유지되고 있다. 이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사진 실천들은 보이지 않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그에 따라 사진의 또 다른 특징들은 아직 탐사되지 않은 캄캄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저자는 스냅사진을 위시한 주류 사진 개념에 맞서 매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서론에서 그는 사진이 그것이 보여주는 현실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려 했던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빌렘 플루서의 사유와 함께 매체 특정성에 관한 최근의 논의를 고찰한다. 이어 “사진을 보는 최고의 렌즈는 사진 바깥에 있다”라는 필리프 뒤부아의 표현을 인용하며, 사진을 비스듬한 시점에서 다시 성찰하고자 함을 밝힌다. 다만 그는 뒤부아가 말한 사진의 외부가 아니라, 매체 내부의 타자가 내몰린 사진의 가장자리에 선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진적 접근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실천들, 즉 ‘실패한 이미지’들이다.
실패의 순간 드러나는 사진의 배후
네 가지 대항 실천으로 읽는 사진 매체의 새로운 얼굴
사진이 실패하는 순간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연출된 사진, 흐릿한 이미지, 과소/과다 노출 이미지, 아카이브 이미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거나, 선명함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빛이 피사체를 밝히지 않거나, 그 속에서 지시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들은 사진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실패의 순간에 사진의 구성 조건과 그 효과의 작동 원리가 형체를 드러낸다.
「연출된 사진」에서는 무대에 올려진 사진, 즉 장면이 구성되었거나 인물이 포즈를 취한 사진뿐만 아니라 조합 인화로 만들어진 회화주의 사진처럼 촬영 이후에 조작된 이미지까지 넓은 범위의 연출된 사진을 다룬다. 사전적·사후적으로 구성된 언–스트레이트 사진은 사진이 곧 순수하고 직설적인 ‘세계의 스냅숏’이라는 기대에 도발을 건다.
「흐릿한 이미지」에서는 흐림이 불러일으키는 시공간의 혼령성을 주로 논한다. 연초점 이미지와 심령사진, 빈곤한 포르노그래피 이미지 등은, 흐림이 시공간적 차원을 비롯해 본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사진 이미지의 조건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과소 노출 이미지, 과다 노출 이미지」에서는 장노출로 촬영된 풍경 사진, 레이오그래프나 시아노타이프와 같은 포토그램 이미지, 이중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진 외 매체에서 드러나는 빛의 행위성을 탐구한다. 부족하거나 과한 빛이 이미지를 와해시킨 여러 사례로부터, 우리는 빛이 사진 이미지가 생겨나기 위한 전제 조건인 동시에 사진 이미지를 산출하는 행위자임을 깨닫게 된다.
「아카이브 이미지」에서는 아카이브적 기록 또는 아카이브로서 사진의 모호한 지위를 고찰하며 이미지가 시각적 목록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탐색한다. 베르티용 카드, 식물표본의 작업 콜라주, 유형학적 초상 사진 등은 아카이브 사진의 예시로 제시된다. 사진 이미지는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때 사실에 대한 시각적 증언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며, 인위적으로 분류되고 배열되어 범주화될 때 비로소 아카이브가 된다.
사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200여 점의 시각 자료
회화, 영화, 문학 등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풍부한 텍스트
한국어판 『실패한 이미지』는 본문에 대응하는 도판 이미지를 페이지의 가장자리에 배치한 원서의 독특한 내지 디자인을 충실히 구현했다. 책의 여백을 채운 의미심장한 이미지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 이폴리트 바야르,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 애나 앳킨스 등 사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초기 사진가들부터 동시대 작가들까지 시대를 가로질러 사진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수록했다. 아우구스트 잔더와 카를 블로스펠트의 아카이브 이미지, 한스 벨머와 만 레이의 초현실주의 사진, 신디 셔먼의 〈무제 영화 스틸〉 연작, 스기모토 히로시의 〈극장들〉 연작, 에드워드 루셰이와 솔 르윗의 격자 배열 이미지 등 잘 알려진 20세기 예술가들의 작품도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 아직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율 크라이여르, 아보이스카 판데르몰런 등 동시대 네덜란드 작가들의 최근 작업까지 다채로운 도판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에 한하지 않고 회화, 영화, 비디오,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예술 작품이 다루어지기도 한다. 가령 헨리 제임스의 단편 「진품」에서 서술된 장시간의 포즈,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편지에 나타난 예술적 환각 경험, 올더스 헉슬리의 에세이 『지각의 문』 속 환영 묘사,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할머니의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소외 효과는 시각예술과 문학, 예술 전반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다. 크라카우어의 『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한국어로 옮긴 이화여자대학교 김남시 교수의 정교한 번역이 다양한 텍스트에 관한 비평과 이론적 맥락을 소상히 이해하게끔 돕는다.
책 속에서
그러니 잠시 포스트모던 사진적 실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진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사진의 또 다른 특징들을 비가시화하거나 주변화했는지 살펴보자. 카메라는 이미지의 기술적 특성을 구현하고 생산하는 장치로서 종종 객관적인 기록 장치로 여겨진다. 그 결과,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은 자연이나 현실을 충실히 복사한다고 믿었고, 여전히 그렇게 믿는 이들도 많다. 앞서 언급한 1951년 글에서 크라카우어는 사진이 객관적이거나 충실하다는 이런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사진이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시각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진은 현실과의 일치 실패에서, 또는 현실과의 일치 거부에서, 현실과의 차이 속에서 드러난다.
관람자는 사진 이미지가 아니라 사진에 찍힌 세계를 읽는다. 이것이 플루서가 세계의 기호(sign) 대신 ‘징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이미지와 그것이 보여주는 세계 사이의 지표적 관계 덕분에 관람자가 사진 이미지를 세계의 스냅숏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진은 객관적이고 비상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관람자들은 사진을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비판은 기술적 이미지 생성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세계분석이다.”
다게레오타이프 초상 사진은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피사체는 오랜 시간 포즈를 유지해야 했다. 요오드화된 은판은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오랜 시간 빛에 노출되어야 희미한 이미지가 나타났다. 초상 사진을 찍는 사람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했다. 이때 긴 노출 시간은 응시하는 시선과 움직임 없는 포즈가 담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긴 노출은 시간의 경험과 잊히지 않는 존재감을 이미지에 새겨 넣었다. 다게레오타이프 기술은 연출되지 않은 스냅사진과는 거의 반대되는, 매우 독특한 시간성의 사진적 기호를 발생시켰다.
자신의 인물 사진 연작에 대한 그의 발언은 통념이 이 장르에 투사해 온 감상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그는 자신이 찍은 인물 사진은 더 이상 그 인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한다. 초상은 그 자체의 현실, 그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를 지닌다. 초상은 그것이 재현하는 인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개별 초상이 아닌 연작 형태로 인물 사진을 제작하는 그의 방식도 이 장르의 해체에 기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을 찍으면, 그 사진은 명백히 그 한 사람에 관한 사진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연작으로 작업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저 혼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에 찍힌 그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초상 사진 속에서 특정 개인을 떠받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면 모호이너지는 물체가 없는 빛의 형태만으로 추상적인 공간적 인상을 만든다. 우리는 그의 이미지에서 검은 배경 위 빛으로서의 빛을 본다. 빛이 물체가 없는 공간적 형상을 형성한다. 이 공간적 형태들은 공중을 떠다니는 듯 보인다. 빛에 의해 비추어진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빛의 형태를 우리가 본다는 사실이, 재현에 봉사하는 물질적 지지체로부터 빛을 정련해 낸다. 그 결과 우리는 빛 그 자체를, 그것이 비추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대신 직접적으로, 빛으로서의 빛을 보게 된다.
물체의 표면, 피부, 머리카락 위에 죽은 듯 떨어져 박힌 빛의 점들은, 빛이라는 행위자가 세계를 반영하는(reflects) 대신 자기 자신을 반사해 버리는(reflects), 사진 매체 특유의 맹점이다. 모든 조명, 밝힘(illumination),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행위가 결국 부질없으며 실패했다는 감각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 빛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깨고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브라크만은 빛의 점(spots)의 형태로 빛을 적시한다(spots). 빛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들, 다른 것을 밝히는 데 실패한 순간들에 말이다. 이 실패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더 이상 투명한 척할 수 없다.
블로스펠트는 자신의 이미지들을 통해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형태, 곧 자연적 형태의 식물적 장식을 탐구한다. 그는 ‘식물의 예술적 형태를 그 자연적 형태로부터’ 추출하기 위해 사진 매체를 이용했다. 그는 디테일에 집중해 그 디테일을 맥락에서 고립시키고 확대함으로써 이 추출을 수행했다. 그 결과 식물의 디테일들이 자율적 존재감을 얻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한 식물의 디테일이나 부분처럼 보이지 않고, 그 자체로서의 존재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술적 형태로의 이런 변형은 이미지를 그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걸 함축한다. 그의 사진에서 우리는 특정한 식물이나 그 식물의 일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경탄스럽게 하는 기본 형태가 담긴 이미지를 본다.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이 이미지는 더 이상 기록이라는 지위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카이브가 된다.
무빙 이미지의 완벽한 연속성은 시간을 재현하지도 저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 자체인데, [그것을 재생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마레와 머이브리지 이미지들의 불연속성은―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먼저 시간을 잘라냄으로써 시간을 수집하고 저장하는 데 [무빙 이미지보다] 더 성공적이다. 시간은 불연속적이 된 다음에야 아카이브될 수 있다. 시간은 분리된 개체들, 선이나 이미지의 형태로만 가독성을 얻는다. 다시 말해, 바로 사진 이미지가 (영화와 달리) 시간에 저항하기 때문에 비로소 시간을 저장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차례
서론: 사진은 언제 실패하는가?
연출된 사진
흐릿한 이미지
과소 노출 이미지, 과다 노출 이미지
아카이브 이미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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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