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글짜씨』는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시각 문화의 여러 층위를 기록하고 탐구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2009년 창간 이래 동시대 디자인 현장의 실천과 학술적 연구를 결합하며, 한국 타이포그래피의 학문적 토대를 다지는 동시에 디자인 비평의 담론을 확장해 왔다. 매 호 특정 주제를 선정하여 디자인을 둘러싼 사회, 기술, 문화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국내외 디자이너와 연구자들의 사고를 연결하는 기록 저장소의 역할을 수행한다.
『글짜씨 26』은 탐험가의 시선으로 ‘지금까지의 타이포그래피’를 조망했고, 『글짜씨 27』은 2024년을 기준으로 ‘지금의 타이포그래피’를 기록했다. 이어 『글짜씨 28』은 현재의 경험을 충실히 담아내고자 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프로파간다로서의 타이포그래피를 비롯해 브랜딩, 제도와 권리, 도구와 글자체 연구, 주요 이벤트 등을 입체적으로 탐구하며 타이포그래피가 사회적 감각이자 전략적 실천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양상을 담아냈다.
이번 『글짜씨 29』는 ‘앞으로의 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급격한 기술 변화와 사회적 요구 속에서 타이포그래피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좌표를 탐색한다. 지난 16년간 축적해 온 물질적 기록을 디지털 환경으로 확장하는 웹 프로젝트 《글짜씨》의 과정을 공유하고, 다양성과 접근성 가이드 제정을 통해 학술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실천의 방향을 제안한다. 인공지능과 기후 위기, 탈식민주의적 교육이라는 거시적 담론에서부터 전시와 출판에 이르는 미시적 방법론까지, 타이포그래피가 맺고 있는 다양한 영역의 변화를 다각도로 기록한다.
글짜씨 29: 앞으로의 타이포그래피
편집자의 글
기술과 사회의 전환기, 타이포그래피가 대면한 미래의 질문들
『글짜씨 29』는 제8대 이사회가 엮는 마지막 호이자, 학술지 창간 16주년을 맞아 새로운 전환점을 기록하는 호이다. 이번 호는 기술과 플랫폼, 사회적 조건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타이포그래피를 하나의 정의로 규정하기보다 복합적인 현실에 대응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모색하는 초기적 탐색을 담았다. 현재의 불확실성 속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과제들에 주목하며 타이포그래피가 지속 가능한 디지털 미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살핀다.
이번 호에는 구모아의 논고 「한글 명조체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조형 구조 변화 요인」이 수록되었다. ‘명조체’라는 이름 아래 포괄적으로 불려온 조형 양식을 시기별로 구분하고 체계화하여 한글 타이포그래피 연구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188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붓글씨의 전통이 근대적 인쇄 활자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가로짜기의 도입과 국가 정책 등 기술적·정치적 환경이 한글 명조체의 조형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기고는 타이포그래피의 윤리와 제도적 확장성에 대한 논의로 문을 연다. 이지원과 조예진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약속과 실천 1.0」을 통해 학술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안한다. 황세미는 종이 매체의 한계를 넘어 디지털 경험으로 확장되는 《글짜씨》 웹 아카이브 구축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며, 온라인 환경에서의 출판 방식과 접근성, 기록의 기준을 점검한다. 존 수에다는 샌프란시스코 레터폼 아카이브에서 열린 《로컬라이제이션: 『글짜씨』 15년》 전시를 통해 학술지가 국제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조명한다.
이어지는 글들은 기술과 교육, 그리고 매체적 실험에 집중한다. 남수영은 디지털 매체 환경에서 텍스트와 여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하고, 오영진은 속도와 구조, 객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타이포그래피의 미래 지형을 조망한다. 어민선은 탈식민적 관점에서 디자인 교육이 지녀야 할 다양성을 강조하며, 필립 팔디아는 정규화된 폰트 데이터를 활용한 머신러닝 기반 글자체 제작 연구의 성과를 공유한다.
전시와 출판 현장을 다룬 기고들은 보다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매터 오브는 생태적·사회적 위기 속에서 지식 생산의 분산화와 포괄성을 지향하는 ‘신 신 타이포그래피’ 방법론을 소개한다. 휘트니 말렛과 임마누엘 양은 『휘트니 리뷰』 사례를 통해 이미지 중심의 시대에 텍스트와 타입 세팅만으로 구축한 대담한 정체성을 논하며 텍스트 중심의 타이포그래피가 독서와 해석의 환경에 가져오는 변화를 살핀다. 논플레이스 스튜디오는 비엔날레라는 방대한 전시 환경 속에서 색채의 응집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을 「잡히지 않는 색채들: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비주얼 디자인」에서 소개하며, 전시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글자체와 매체가 개입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이름은 「살아있는 색인으로서의 전시 출판물: 『《불완전한 리서치: 그래픽 디자인과 큐레토리얼》』」에서 리서치와 큐레토리얼을 잇는 유동적인 기록의 역할을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글자체 프로젝트 아카이브에서는 동시대 글자체 디자인의 현장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에드워드 주와이(줄라이 타입)는 도시 교통 시스템을 위한 공공 글자체 「서울 알림체」의 개발 과정을 소개하며, 한글과 라틴을 아우르는 다문자 공공 글자체 시스템을 구축한 경험을 공유한다. 이가희와 이효진(직지소프트)은 30년 역사를 지닌 「세명조」를 오늘의 사용 환경에 맞게 재해석한 《SM리뉴얼 프로젝트》를 기록한다. 요하네스 브라이어(디나모)는 《Dinamo Specimen 2》와 「Areal」 사례를 통해 도구와 기술적 조건이 글자체 제작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다. 이도희(이도 타입)는 아티스트 제니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젠 세리프」를 통해 블랙레터 조형을 한글로 재해석하는 가능성과 그 확장성을 제시한다.
책 속에서
《글짜씨》는 매체 전환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대신, 읽기 환경에 집중해 본질만 남기는 방식을 택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덜어낸 형태로 때로 당황스럽지만, 그만큼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하나씩 덜어내는 과정에서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어떤 순서로 구성되어야 하는지가 비로소 명확해졌다. 단순화는 제거가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과거의 작가들이 고통스럽게 마주했던 흰 종이의 여백은 어떤 것도 쓰일 수 있는 순수한 가능성의 비유다. …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공백을 발견하는가이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여백을 붙들기 보다, 다양한 이미지가 채워진 현실의 공간들을 누구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보이지 않았던 공간에 누군가 새로운 문자, 숫자, 혹은 색채나 도형을 기입했을 때에서야, 우리는 그것이 여백이었음을 깨닫는다.
인공지능 시대의 시와 타이포그래피를 둘러싼 핵심 질문은 ‘언어를 어떻게 보이게 만들 것인가’에서 ‘언어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 독자는 더 이상 페이지 위에 놓인 형태만을 읽지 않고 그 형태를 가능하게 만든 알고리즘적 힘과 데이터의 편향, 모델이 학습한 세계의 분포까지 함께 가늠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더 이상 타이포그래피의 전체 스펙트럼을 단독으로 포괄하는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 신 타이포그래피(New New Typography)’의 과제는, 증식하는 다양한 타이포그래피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지을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색은 끊임없이 변하는 지각의 경험이다. 마젠타와 시안 사이에는 무수한 보라색의 층위가 있다. 어쩌면 ‘일관성’ 자체가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정밀하게 보정하고 측정해도, 색은 늘 우리를 비켜간다. 그러나 바로 그 변화와 편차 속에서 이번 전시의 시각 언어가 만들어졌다. 디자인은 절대적 통제가 아니라, 감각과 반응, 그리고 공명에 관한 일임을. 수많은 보라색의 음영이 공존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불완전한 리서치: 그래픽 디자인과 큐레토리얼》』은 제목이 암시하듯, 집단적 연구가 가능한 열린 형태의 아카이브를 지향했다. 이 기획에서 ‘불완전함’은 결함이 아닌, 흩어진 기억들이 모여 살아 있는 담론이 되는 잠재력을 드러내고자 한 적극적인 큐레토리얼 장치였다. 완결된 리서치를 보여주기보다 관람객의 참여와 증언을 통해 채워져야 할 공백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AI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는 인간의 창의성과 장인성에 깊은 존중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ChatGPT 광고조차도 대형 에이전시의 재능 있는 디자인팀이 제작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기술 기업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제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장려하지만, 정작 그 가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인간 디자이너들의 역량에 의존한다. 이 사실이 많은 것을 선사한다.
양적 성장에 비해 높은 완성도와 섬세한 미감을 갖춘 글자체는 오히려 보기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AI나 가변 글꼴 등 매력적인 기술이 손쉽게 접근 가능한 시대지만,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타임리스한 한글 글자체를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환경이 아무리 빠르게 변화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차례
논고
한글 명조체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조형 구조 변화 요인: 1880년대-1990년대까지 | 구모아
여는 글
박유선, 유도원
기고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약속과 실천 1.0 | 이지원, 조예진
『글짜씨』에서 《글짜씨》로 | 황세미
로컬라이제이션: 『글짜씨』 15년 | 존 수에다
비유하는 말과 비상하는 이미지, 그 사이 공간에 대하여 – 디지털 매체와 여백의 상상 | 남수영
타이포그래피의 미래: 속도, 구조, 객체 | 오영진
다름을 받아들이는 디자인 교육의 작은 실천: 메릴랜드예술대학교와 브루클린에서의 기억을 돌아보며 (2017-2024) | 어민선
정규화된 폰트 데이터 기반 머신러닝 폰트 생성 | 필립 팔디아
신(新) 신 타이포그래피 | 매터 오브
텍스트 중심의 신문형 정체성 구축을 위한 『휘트니 리뷰』의 대담한 접근법 | 휘트니 말렛, 임마누엘 양
잡히지 않는 색채들: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비주얼 디자인 | 논플레이스 스튜디오
살아있는 색인으로서의 전시 출판물: 『《불완전한 리서치: 그래픽 디자인과 큐레토리얼》』 | 이름
글자체 프로젝트 아카이브
Dinamo Specimen 2 & Areal | 요하네스 브라이어
서울 알림체 | 에드워드 주와이
SM리뉴얼 프로젝트 - New SM 세명조 | 이가희, 이효진
젠 세리프 | 이도희
학회
참여자
논문 규정